최근 졸업 프로젝트 팀원과 함께 프로젝트 진행에 도움이 될 서적들을 골라 읽으며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디자인과 인간심리>는 UX 디자인계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책이다. 도널드 노먼은 인지과학과 UX 디자인의 대부이자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디자인과 인간심리>는 1988년 초판이 출간된 이래 25년 이상 애독되어 왔으며, 이제는 디자인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일반 심리학에 대한 내용을 누구나 알기 쉽게 다루고 있다.
나는 초판과 개정증보판 중 초판을 선택했다. 초판을 선택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잘 활용하지 않던 아이패드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e북을 선택하고 싶었다. 의아하게도 초판은 e북을 제공하고 있었으나 2013년에 발간된 개정증보판은 e북이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낮은 번역 퀄리티였다. <디자인과 인간심리>를 검색하다 보면 낮은 번역 퀄리티를 비판하는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초판만 번역 퀄리티가 낮았다면 주저 없이 개정판을 구매했겠지만, 의아하게도 개정판 또한 번역으로 많은 욕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 서적을 선택할 때 번역 퀄리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정 불만족스러우면 나중에 원서를 한번 더 볼 생각으로 비교적 저렴한 이북을 선택했다.
많은 선행 리뷰들이 말해주듯이 좋지 못한 번역 퀄리티로 읽는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하루에 30장씩 읽겠다는 나만의 규칙을 세우고 틈틈이 읽어 약 12일 만에 완독했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을 소개해볼까 한다.
"문에 글자를 써넣어야 제대로 열 수 있다면 그 디자인은 이미 결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118p.)
문 손잡이의 디자인은 사용성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일상 속에서 '당기시오' 스티커가 붙어 있는 문을 수없이 많이 봐왔을 것이다. 당겨야 하는 문을 밀어서 열려고 하는 탓에 실내에 있는 사람이 다치거나 기계가 손상될 위험을 줄이고자 붙여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스티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도널드 노먼에 따르면 애초에 '당기시오'라는 글자를 표시해야만 제대로 열 수 있다면, 이미 그 디자인은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훌륭한 자동차 문 예시를 보면, 한 자동차에 나란히 붙어 있지만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제대로 된 방법으로 시도하지 않는다면 열리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당겨야 하는 문을 디자인할 땐, 당겨야만 하도록 문 손잡이를 디자인하면 되는 것이다.
의도한 조작 방식과 그 디자인이 일치하는가?
도널드 노먼은 이를 <디자인과 인간심리>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한다. 그는 앞서 보여준 자동차 문 손잡이 디자인 외에도 수도꼭지를 사례로 들어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수도꼭지는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물의 온도와 양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쉐필드 대학 란무어 기숙사 내에 있는 수도꼭지는 실제로는 눌러야 하는 수도꼭지지만, 돌려서 작동하는 수도꼭지처럼 디자인되어 있었다. 피곤한 건물관리인은 늘 불려 다니며 새로운 사용자에게 수도꼭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했고, 나중에는 안내서에 '수도꼭지 사용 안내서'를 붙여두었다. 간단한 물건에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디자인의 확실한 증거라며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저자인 도널드 노먼은 책의 후반부에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친다. '미래에는 이런 것이 나올 것이다'는 도널드 노먼의 예측은 1988년에 출간된 책에 실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날의 물건들과 닮았다. 사용성 전문가인 그에게는 미래 기술의 변화가 훤히 보였던 것일까?
마지막 장 즈음에서 노먼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언급한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많은 데이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는 알맹이가 부족하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게 꾸민 인스턴트 정보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광고를 피해 양질의 정보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검색 요령이 없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단순히 검색에 잘 걸리기 위해 키워드 최적화에만 애쓰는 텍스트, 의미 없는 이미지로만 가득한 블로그, 물건을 제공받아 광고로 작성한 글뿐이다. 사용자들은 이미 이러한 불편을 삶에서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양질 콘텐츠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저자가 예측한 대로 혼돈 그 자체다.
책을 모두 읽은 뒤 의미 깊었던 부분을 모아 형광펜을 그으며 다시 한번 읽어봤다.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과 인간심리>는 UX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들에게는 많은 인사이트를,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식을 준다. 일반 심리학 서적으로 유명한 만큼 일반인에게도 상식의 폭을 넓혀줄 가벼운 책으로써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번역상태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디자이너들에게 고전으로 취급되어 온 만큼 좋은 책이었다. 다음에는 원서로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